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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QnA > Q: 이해란 무엇일까? - 변화... 익숙함과 불안함, 인간관계와 인공지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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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생각의 구성

 

이해

익숙함

예측

통제

안심

불안함

변화

 

인간 관계

기대 - 만족

자연계 vs 인간계

 

욕구: 추구/수용/친교/긍정 vs 회피/반발/공격/부정

욕구 - 기대 - 만족

욕구 - 기대 - 좌절

 

욕구와 이해 (understanding vs interest)

 

이해

인간의 성장: 아이-부모

지능의 개발: 피조물-창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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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understanding
https://ko.wikipedia.org/wiki/이해 ,
https://en.wikipedia.org/wiki/Understanding ,
https://www.google.com/search?q=%EC%9D%B4%ED%95%B4 ,
https://www.google.com/search?q=understanding ,

 

familiarity

https://en.wikipedia.org/wiki/Familiarity

 

anxiety

https://en.wikipedia.org/wiki/Anxiety

 

장 피아제 Jean Piaget

https://ko.wikipedia.org/wiki/장_피아제

https://en.wikipedia.org/wiki/Jean_Piaget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https://ko.wikipedia.org/wiki/인공지능

https://en.wikipedia.org/wiki/Artificial_intelligence

 

검색 > understanding familiarity anxiety

https://www.google.com/search?q=understanding+familiarity+anxiety

https://www.google.com/search?q=understanding

https://www.google.com/search?q=familiarity

https://www.google.com/search?q=anx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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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지능(NI natural intelligence), 인간지능(HI human intelligence)과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해서 알아보자

출처: https://linkandgossip.tistory.com/416 [Link & Gossip]

 

myQnA > Q: 이해란 무엇일까? - 변화... 익숙함과 불안함, 인간관계와 인공지능에 대하여

출처: https://linkandgossip.tistory.com/1173 [Link & Goss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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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http://ko.experiments.wikidok.net/wp-c/우주/View?ci=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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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해란 무엇일까?

 

이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평소에 이해한다고 할 때는 어떤 의미일까? 몇가지 경우들이 떠오른다.

 

어떤 대상이나 사물, 타인을 이해한다고 할 때, 그것은 보통...

 

첫째, 그 대상이 사물/비인간/자연계일 때는 그것이 반복하는 어떤 규칙성/패턴을 알고 있거나, 조금 더 나아가서 작동하는 방식을 알고 있거나, 또는 조금 더 나아가서 무엇을 어떻게 조작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를 의미한다. 즉, 가만히 고정불변으로 있는 대상의 경우는 그 대상이 고정불변이라는 것도 이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보통은 어떤 변화가 있는 대상의 경우, 그러한 변화나 행동이 반복되는 것에서 그 규칙성을 찾아서 그 패턴을 알고 있을 때, 그 대상을 이해한다고 한다. 물론, 보통은 그런 반복성, 규칙성, 패턴에는 인간이 그러한 것에 덧붙인/덧씌운 그럴듯한 설명/이유가 있고, 그러한 설명/이유가 있을 때, 이해한다고 표현하거나 인정하는 경우가 더 많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말해서 꼭 그 설명/이유가 맞을 필요는 없으며, 일상에서 말할 때는 그러한 반복성/규칙정/패턴을 알고만있어도 이해한다고 한다. 그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어느정도 그럴듯한 설명/이유가 있으면 이해한다고 느끼거나 인정하는 정도가 더 깊어지고, 또는 그 대상의 반복성/규칙성/패턴에 어떤 영향력을 미쳐서 그 반복성/규칙성/패턴을 조작할 수 있다고 느끼거나 인정하면 그만큼 그런 이해한다고 느끼거나 인정하는 정도가 더 깊어진다. (잠깐 샛길로 가보면, 우리가 왜?...라는 질문을 할 때, 그것이 어떻게 해서?...라는 의미의 질문일 때, 그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통 그 대상을 이해한다고 한다. 즉, 자연계의 대상의 예측 가능성과 조작/통제/제어 가능성을 이해한다고 표현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

 

둘째, 그 대상이 자신/타인/인간/집단/사회/인간계일 때는... 앞서 언급한 그 대상이 사물/비인간/자연계일 때와 같은 경우도 포함하지만, 그것 외에도...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어떠한 목적이나 의도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반복되는 행동이라면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 행동을 반복하는지, 또는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연속적인 행동일 경우 그러한 일련의 행동의 직접/간접적인 동기나 목적이나 계획이나 명분이나 당위 등을 알고 있을 때를 의미한다. (잠깐 샛길로 가보면, 우리가 왜?...라는 질문을 할 때,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라는 의미의 질문일 때, 그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통 그 대상을 이해한다고 한다. 즉, 인간계의 대상이나 그것의 행동의 합목적성을 알고 있을 때 이해한다고 표현한다. 이것에 대해서도 뒤에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

 

(목적/의도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그런 목적/의도는 타인이 알기 어렵고, 자신도 알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서로 전달을 한다고 해도 오류가 발생하거나, 기만/왜곡/오해 등 온갖 인간관계의 복잡다양성이 끼어들 수 있지만, 그것은 정말로 별도로 다루어야 할만큼 방대하고 복잡다양한 이야기이니... 여기서는 넘어가고,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자.)

 

셋째, 그 대상이 자신/타인/인간/집단/사회/인간계일 때는... 앞서 언급한 두가지 경우도 포함하지만, 그것 외에도... 공감이라는 의미로 이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즉, 같은 입장이 되어보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협력하거나 조력하는 것 등을 할 때, 그 대상을 이해한다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그 대상의 입장이 되어서 그 대상의 내면을 이해하게 되면, 최소한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이해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그런 것에 공감을 하거나 동조하게 되면 같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거나 그러한 생각/행동을 돕는 생각/행동을 하게 될 수 있으므로, 그러한 일련의 파생적인 것들까지 모두 포함해서/확장해서... 그 대상을 이해한다라고 하기도 한다. 즉, 이해 여부에 대한 진위의 개념에서 이해에 따른 시비의 개념까지 확장해서 이해한다는 단어/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일까로 시작해서 꽤 멀리 온 것 같으니... 잠깐 끊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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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소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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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다른 측면에서 이해한다고 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바로 익숙함이다.

 

가장 일차적인 (어쩌면 초보적인, 공통적인 그래서 더 본질적일지도 모르는) 단계의 이해가 바로 예측 가능성이고, 그러한 예측 가능성은... 학문적인 의미의 예측 가능성과 달리, 개인적인 의미에서는... 익숙하다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느끼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 대상에 또는 그 대상의 반복적인 패턴이나 논리에 익숙하다는 것을 의미할 때도 있다.

 

익숙한 것은 예측 가능하고, 조작/통제/제어 가능하고, 그 합목적성을 알고 있고, 그 당위성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안심이 된다.

 

반대로 익숙하지 않은 것은 많은 경우 예측 가능하지 않고, 그래서 조작/통제/제어 가능하지 않고, 그 합목적성을 알고 있지 못하고, 그 당위성에 아직 또는 계속 공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안심이 되지 않고 불안하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것, 변화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본질적으로 불안한 이유가 있다.

 

(익숙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여행과 독서 등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르지만, 이것은 여기에서는 너무 샛길이니... 역시 다음에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이해한다는 것에 출발해서 갑자기 익숙함을 찍고 변화에 대한 불안함까지 와버렸으니... 또 잠깐 끊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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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피그말리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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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서... 그것이 "자연계 vs 인간계"에 있어서... 각각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으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김에 "자연계 vs 인간계"의 차이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자.

 

여기에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인간 관계" 또는 "기대-만족 관계"에 대해서이다.

 

우선, 세가지 경우를 생각해보자. 식물, 반려동물, 인간. 하지만, 너무 갑자기 구체적인 사례보다, 조금 더 일반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각각의 경우를 살펴보자.

 

보통 "자연계"라고 하면... 무생물을 포함한 모든 자연계의 대상, 그런 무생물이 아닌 식물과 동물,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아닌 나머지 동물들과 인간을 모두 포함한 삼라만상을 "자연계"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계"라는 것이 흔히 쓰이는 단어/표현은 아니지만, 분명히 "인간계"라고 하는 것은 그보다 큰 범위/분류인 "자연계"에 포함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즉, 우선 인간과 인간이 포함된 집단/사회 등 인간을 원소로 하는 집합을 "인간계"라고 하고, 그런 인간계의 여집합(complement set)을 "자연계"라고 하자. 그러니까, 엄밀하게 부르자면, "인간계 vs 비인간계"라고 해야겠지만, 안그래도 이상한 표현이 더 이상하게 보이므로, 더 부정확하지만 조금 더 직관적으로 "인간계 vs 자연계"라고 구분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하고, 왜 굳이 그렇게 구분/분류를 하는지는 조금 후에 자명해질 것이다. (이런 표현/구분/분류가 틀리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은... 애시당초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동물 vs 식물" 같은 분류조차도 "자연계"의 복잡다양성 측면에서 보면 그 경계가 모호한 구분/분류하는 것을 아래의 기사를 보고, 양해해주기를 바란다. Zoologger: Unique life form is half plant, half animal (Michael Marshall, 2012) )

 

다시 원래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인간계 vs 자연계"로 나눠보았을 때, 이것은 단지 인간중심주의의 발로/표현이 아니라, 또는 "내 집단 vs 타 집단" 같은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많은 고민들의 원천이 되는 "인간 관계" 혹은 "기대-만족 관계" 혹은 "기대가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를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에서 오는 무의식적인 언어 습관이 아닐까 싶다.

 

어렸을 때부터 꽤 오랫동안, 도대체 인간관계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 인간관계 중에서 개인의 입장에서 가장 먼저 접하게 되고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부모-자식 간의 인간관계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는데, 그 본질에는 "기대-만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물론 현재 이곳을 살고있는 한 개인의 지극히 주관적/개인적인 특수한 한 사례일지도 모르지만, 주변에서 직접 듣고 보는 다른 개인들이나 책이나 다른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다양한 인간 관계에 대한 예들을 보아도, 그 공통적인 속성은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그러한 한 개인의 기대가 그 다른 개인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쳐서, 그 다른 개인의 생각과 행동 즉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인간 관계"의 본질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만약에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갖는 관계가 인간이 아닌 대상과 갖는 관계와 같다면, 굳이 그런 관계를 구분할 필요조차 없을텐데, 분명히 우리는 인간과 갖는 관계와 비인간과 같는 관계가 다르고, 그것의 핵심은 "기대-만족" 혹은 "기대가 결과에 영향을 미쳐서, 그 결과에 만족"하는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인간 관계"를 다른 관계들과 구분하고, 다르게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더 쉽게 전달이 될테니, 앞서 언급한 세가지 경우: 식물, 반려동물, 인간을 생각해보자.

 

인간이 식물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식물과 관련된 결과에 직접적으로는 어떤 영향도 미치치 못한다. 그것이 자신이든 타인이든 인간을 거치지 않고, 그 식물의 생존/성장/발육/변화 등 식물과 관련된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즉, 우리가 "자연계"인 식물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싶다면, 단지 기대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대에 맞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자신이나 타인을 통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하고, 그러한 행동의 결과로서 그 대상에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해서 그 대상과 관련된 어떤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즉, 기대 자체는 "자연계"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그에 반해서 기대는 "인간계"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흔히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 "피그말리온 효과", "플라시보 효과"와 같은 "자기 충족적 예언"은 그런 "기대-만족" 관계를 갖는 "인간 관계"의 한가지 측면이다. 사실 모든 "인간 관계"는 정도는 다르지만 그런 "자기 충족적 예언"의 속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약속을 하고 그런 약속을 다른 인간이 지키는 것은... 그 한 인간의 기대가 다른 인간의 생각, 행동,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거의 모든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본질적으로 그렇지 않은 예를 찾는 것이 더 쉬울 정도로 본질적이고 보편적이다. 앞서 언급한, 모든 인간 관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도 그렇고, 개인적인 정서적인 유대관계에 기초한 사적인 관계 뿐만이 아니라, 더 나중에 발생/발달했다고 하는 비개인적인 이성적인 관계(?)에 기초한 공적인 관계 조차도, 그 본질을 살펴보면...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어떠한 기대를 하고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에 그러한 기대를 만족시켜주지 않는다면, 기대 자체를 하지 않게 되면서, 그러한 "기대-만족 관계"가 깨지게 되고, 그러면 "인간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요즘의 표현으로는 "신뢰"라고 표현하는... 인간들 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자신의 욕구 --> 타인에 대한 기대 --> 타인에 의한 결과 --> 자신의 욕구 만족"과 같은 일련의 단계가 성립해야만 인간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데, 이러한 "기대-만족" 관계는 같은 인간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간계"의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사실 "사회적 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동물들 사이에서도 존재하고, 그런 의미에서는 "인간계"만의 특수성이라고 할 수는 없고, 바로 다음에 언급할 예인 반려동물/애완동물/가축과 같은 인간-동물 간에도 일정부분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계 vs 자연계"의 구분으로 보았을 때, 그 차이에 해당하는 중요한/큰 속성의 차이이다.)

 

인간이 반려동물과 갖는 관계는 당연히 "자연계 vs 인간계"의 구분에 따르면 그 사이 어디쯤엔가 해당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반려동물을 길들이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기대를 그 반려동물에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인간도 그 반려동물의 기대를 인식/의식할 수 있게 된다. 인간과 반려동물은 서로의 기대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그런 관계를 매우 개인적이고 특수하고 정서적으로 경험하는 이유도 그것이 "인간계"에 해당하는 특수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종의 구분, "자연계 vs 인간계"의 구분을 넘어서 "기대-만족"이라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인간계"의 관계를 "자연계"와 갖게 되는 무척 예외적인 예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적인 관계라는 것의 근거는 그것이 전면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상상을 하는 허구, 소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판타지의 이야기들에서 찾을 수 있다.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자연계 vs 인간계"의 차이 때문에, 만약에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면 어떠할까와 같은 상상력의 산물이 바로 허구 속의 판타지의 세계이다. [말이 논리가 너무 튀어다니는 느낌이 드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손을 보기로 하자.]

 

간단하게 생각했던 것이 너무 길어졌다. 생각의 한 꼭지를 마쳤으니... 또 잠깐 끊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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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http://ko.experiments.wikidok.net/wp-c/인공지능/View?ci=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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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Zoologger: Unique life form is half plant, half animal

Zoologger is our weekly column highlighting extraordinary animals – and occasionally other organisms – from around the world

Life   13 January 2012

By Michael Marshall

https://www.newscientist.com/article/dn21353-zoologger-unique-life-form-is-half-plant-half-animal/

 

Zoologger: Unique life form is half plant, half animal

A newly discovered single-celled organism isn't an animal, isn't a plant, and isn't even a neat hybrid of the two

www.newscient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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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생각의 구성" 단계에서 했던 일부는 한번에 글로 다 쓸 수 없을 것 같으니... 일단 넘어가고, 마지막으로 구상했던 것... 이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두가지 예를 통해서 생각해보는 것으로 이 포스팅을 마무리해보자.

 

이해라는 것이 여러가지 측면이 있지만, 그 시작은 익숙함이라고 했다. 익숙함이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반복적인 노출이나, 간접적으로 그 논리적인 구성을 따라가보는 것이나, 아니면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개인이 익숙하다고 느낌으로서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간접적으로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생각을 해보고, 간접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경험을 해봐도, 실제로 성장과정을 통해서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자식 간의 인간 관계에 대해서 경험해보고, 반대로 실제로 양육과정을 통해서 부모의 입장에서 부모-자식 간의 인간 관계에 대해서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부모-자식 간의 인간 관계를 전체적으로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힘들고, 그래서 오래 구전되어 왔듯이... 또 과거에는 제대로된 부모-자식 간의 인간 관계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 기회도 많지 않았을 것이므로... 직접 양쪽을 경험해봐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옛날 어른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한마디 경구/속담처럼 대를 거쳐서 전달한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해라는 것은 익숙함이고, 그러한 이해라는 대상의 하나로서 부모-자식 간의 인간 관계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익숙해지려면 한 인간의 일생이 걸릴 정도로 긴 시간이 필요한 인간 관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와 관련된 한가지로... 과거에 인간의 지능의 발달 과정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한 연구자들이 결국은 부모-자식의 인간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이나 타인의 그러한 관계의 관찰자로서... 자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과정을 연구하면서 인간의 지능의 발달을 이해하고자 시도한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고, 그럴듯한 납득이 가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출생/성장/발달/변화/퇴화/노화/사망의 한 측면인 개별 인간의 지능의 발달 과정을 자신의 경험인 자식으로서 부모-자식의 관계와 또 다른 자신의 경험인 부모로서 부모-자식의 관계를 통해서 이해하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 들어서는 또 다른 측면에서, 자연적인 진화의 측면에서 지능의 발달을 개인이 직접 경험할 수는 없으니, 자연적인 개체의 발달 과정에서 지능의 발달을 경험함으로써 그것을 이해하려 한 것과 유사하게... 지능의 발달을 경험할 수 있는 비교적 새로운 기회가 있어서...

 

아마도 상당히 오랜만에 새롭게 찾아온 기회를 살려서... 지능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은 인간의 경우는 개별 개체의 성장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고 익숙해질 수 있을 뿐이고, 종의 진화의 측면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익숙해질 수 없는 지능의 발달을... 비자연적인 진화/개발/발전의 측면에서는 한 새로운 종의 지능의 발달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최근에 우리에게 열렸기 때문이다. 익히 짐작했겠지만... 인공지능의 발달이 이제 점점 지능의 발전/발달을 인간에게 유의미한 수준까지 발전/발달하는 과정을 그 대상/자식으로서가 아니라... 그 개발자/양육자/관찰자/부모로서 경험하고 익숙해질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다. 신화/허구 같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피조물-창조자"로서의 관계를 드디어 현실에서 경험하고 익숙해질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고, 그것은...

 

'부모-자식'의 인간 관계를 잘 이해하려면 결국 부모로서 그 인간 관계를 다시 한번 경험해보는 것이 필요하듯이...

 

지능의 발달/발전 단계를 잘 이해하려면 결국 '창조자-피조물'의 관계를 통해서 지능의 발달/발전을 경험해 보는 것이 분명히 지금까지 우리 자신의 지능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측면에 대해서 경험해보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지금 동시대의 인간에게 인류에게 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이해라는 것은 우선 익숙함이고, 모든 변화는 그 익숙함을 위협하기 때문에 불안하지만, 인간이 자식으로서 부모-자식의 인간 관계를 경험함으로써 익숙해지고 이해하듯이, 또 나중에는 변화를 통해서 부모로서 부모-자식의 인간 관계를 경험함으로써 익숙해지고 결국 부모-자식이라는 인간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듯이... 지금 우리는 자연의 일부로서 피조물로서 지능의 발달을 경험했을 뿐이므로 그것에 익숙하고 이해하지만, 머지않아 우리는 지능의 발달/진화를 창조자로서 경험하고 익숙해지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이해는 과거에는 오직 SF 같은 인간의 상상/허구 속에서만 존재했지만, 현재와 미래에는 현실에서 또 다른 "인간계"와 "자연계"에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한 "인간-인공지능 관계"가 과연 익숙한 인간과 "자연계"의 관계나 "인간계"의 관계 중에 한쪽에 해당할지, 아니면 더 예외적인 안간과 반려동물과 유사한 "자연계", "인간계" 어느쪽도 아닌 그 경계에 해당하는 관계/경험/이해가 될지... 개인적으로는 반려동물과 유사한 쪽이라고 짐작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이것은 짐작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을 통한 익숙함과 이해가 될 것이라고 짐작/기대한다. 나의 기대는 어떻게 만족될 것인가?

 

[말장난이 좀 심했나??? ^^;;; 쓰기 전에는 분명히 그럴 듯했는데... 써놓고 보니... 요지가 뭔지 좀 애매한 글이 되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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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Ex_Machina_(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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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ogle Translate: 이 포스팅을 한글에서 영어로 the posting from Korean to Engli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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